![[기록] 가황 나훈아의 ‘공’에서 발견한 인생, 채울 것 그리고 비울 것 1 산책길](https://www.thebotong.com/wp-content/uploads/2026/01/road.jpg)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집 뒤엔 보통걸음으로 두어 시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 있다. 그 자태가 썩 못난 편도 아니어서 외지인도 많이 찾는 산이다.
나는 이 동네로 이사 와서 처음 몇 년간 열심히 이 산을 찾았다. 주로 주말이었고, 주중이라도 빨간 날이면 어김없이 이 산을 찾았다.
그날도 평소처럼 느긋하지도 빠르지도 않은 보통걸음으로 산을 찾았다. 초입에 있는 계곡에서 만난 도롱뇽에 인사를 하고, 자주 만나 눈에 익은 나무들에게도 눈인사를 보내며 걷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트로트 리듬의 처음 듣는 노래였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또 다른 손엔 집게를 들고서 쓰레기를 줍고 있는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노래는 그 할아버지의 허리에 달린 소형 레코드에서 나왔다.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 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우리 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잠시 왔다가는 인생 잠시 머물다 갈 세상
백 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 보면 알게 돼 버린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이미 늦어도
그런대로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잠시 스쳐가는 청춘 훌쩍 가버린 세월
백 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살다 보면 알게 돼 비운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나훈아 공(空)
허리춤의 레코드엔 몇 곡만 있는지 나왔던 곡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일부러 걸음을 늦춰 그 노래를 몇 번이고 들었다. 왠지 그 노랫말이 가슴에 박혔기 때문이다.
노래는 읊조리는 듯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어 얘기하듯 편안하게 들리는데 그 멜로디에 얹혀 있는 가사가 예사롭지 않다. 긴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관조하는 느낌을 준다.
“노래가 참 좋습니다. 나훈아 목소리 같은데 새로 나온 노래인가요?”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넸더니 할아버지는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나훈아 맞습니다. 제목이 ‘공’인데 노래도 좋고 가사도 좋아서 이렇게 매일 듣고 있지요.”
‘공’의 가사는, 인생은 무상한 것이고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고 얘기하는 듯해서 쇼펜하우어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는 도입부의 몇몇 구절에 몰입한 때문이다. 뒤따라 나오는 “그런대로 살만한 세상”이란 구절은 곡 전체에 흐르는 ‘비움’이란 분위기에 묻힌 느낌이 강하다.
‘공(空)’이란 노래는 듣는 사람마다 그 감정이 다르겠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천년은 고사하고 백 년 이상 살 자신이 없을 때 특히 더 그렇다.
가수 나훈아, 그의 이름 앞에는 가황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가요의 황제라는 뜻이다. 황제라는 영광스럽지만 무거운 칭호가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면 새삼 그가 대단한 가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대단한 가수가 말년에 이런 멋진 곡을 냈었구나.
요즘엔 산에 젊은 층도 제법 보이지만 내가 한창 산을 찾을 때는 거의 중년들이었다. 운동이 목적인 사람도 있고,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휴지를 줍던 할아버지처럼 다른 이유로 산을 찾는 사람도 있다.
나는 산에 버리러 간다. 머릿속에 가득 들어있는 도시의 찌꺼기를 산에 두고 온다. 무겁게 갔다가 가볍게 돌아온다.
“젊었을 때는 채우고 나이가 들면 비워라”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인지, 아니면 어느 책 속의 구절인지 모르겠지만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 구절이다. 젊었을 땐 배우고 익히고 모아야 하니 채워야 하고, 나이가 들어선 채워진 것들로 인해 나 자신이 힘들어질 수 있으니 비워나가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채우는 것은 어렵지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비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실천하기가 어렵다. 채움은 기술적이고 기능적인 일이어서 익히면 능숙해진다. 그러나 비움은 온전히 마음에 달려있다. 제 것이면서도 제 맘대로 못하는 것이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산의 도움을 받고 있다.
열심히 채울 것, 그리고 더 열심히 비울 것! 그날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다른 기억은 없는데 그 노래만은 또렷하게 남아있다.
글 · 보통아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