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유튜브에서 본 안동소주, 왜 내 마음은 편치 않았나

andong soju
명인 박재서 안동소주 [사진-유튜브 ‘예나러브’ 캡처]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 중 한국·러시아 국제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 있다. 선한 느낌의 한국인 남편과 귀엽고 순수한 러시아인 아내가 주인공이다. 최근엔 러시아에서 의사 생활을 그만두고 공부를 위해 한국에 와 있는 아내의 언니, 즉 처형이 게스트로 자주 등장한다. 이 처형은 ‘보드카의 나라’ 러시아 출신답게 술이 아주 세다. 단순히 잘 마실 뿐만 아니라 술 자체를 즐겨서, 요즘은 채널 내에서 확실한 ‘애주가’ 캐릭터로 굳어가는 중이다.

최근 이 채널에 제부인 한국인 남편이 처형에게 안동소주를 소개하는 에피소드가 올라왔다. 그런데 이 영상이, 내게는 묘하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예전에 남편이 러시아에 갔을 때, 한국 소주를 처가 식구들에게 처음 선보인 영상이 있었다. 그때 소주를 맛본 처형이 “물을 왜 가져왔어?”라고 황당해하는 대목이 있었다. 보통 한국 소주의 도수가 16도 안팎이라는데, 보드카에 익숙한 처형에게는 물처럼 맹맹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제부인 한국인 남편이 바로 그 기억을 소환했다. 한국에도 보드카 못지않게 독한 술이 있다는 걸 본때 있게 보여줄 작정이었다. 그렇게 남편이 비장의 무기로 꺼내 든 술이 바로 무형문화재 박재서 명인의 이름이 걸린, 하얀 도자기 병의 ‘안동소주’였다. 그러니까 한국 전통주의 매운맛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이번 에피소드의 핵심 주제였다.

그렇게 한국의 자존심을 걸고 내놓은 비장의 무기를 보며, 나 역시 모니터 너머로 내심 응원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정작 내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은 술의 도수도, 러시아 처형의 반응도 아니었다. 화면 가득 잡힌 도자기 병의 정중앙을 위압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한자 로고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주라며 당당하게 꺼내 든 하얀 도자기 병에 ‘안동소주(安東燒酒)’가 시퍼런 한자로 박혀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낯부끄러운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그 뒤로 이어지는 영상 내용들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국이 좋아 한국에서 공부하며 우리 문화를 익히고 있는 손님에게 내놓는 ‘가장 한국적인 술’인데, 정작 그 얼굴에는 우리 글인 한글이 설 자리가 없었으니. 그 장면은 마치 갓을 쓰고 도포를 두른 어르신이 외국인 학생 앞에서 묵직한 한자 서책을 펼쳐 보이는 것처럼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물론 아무런 생각 없이 보면 한복과 한자의 조합이 그저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아쉬움을 느끼는 사람도 분명 있지 않을까.

앞선 글 ‘아기다리 고기다리‘나 ‘이 시대의 문법‘, 혹은 ‘세종의 나라‘를 통해서도 느꼈겠지만, 어쩌면 한글에 대한 나의 각별함이 유별나서 유독 눈에 밟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을 이어갈수록 이것이 그저 나만의 유별난 감상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뒤에 확인해 보니 안동소주에는 두 명인이 있었다. 이번 영상에 나온 ‘명인 박재서 안동소주’ 말고도 ‘민속주 조옥화 안동소주’가 또 있었는데, 슬프게도 그곳 역시 거대한 한자가 위풍당당하게 병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통주 업계, 특히 역사와 권위가 깊은 명인들의 브랜드가 이토록 한자 표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그것을 ‘전통’이자 ‘품격’이라고 믿는 것일까. 획수가 복잡한 한자가 주는 특유의 묵직함이 제품의 급을 높여줄 것이라는, 일종의 ‘문화적 관성’에 매몰된 탓은 아닐까. 하지만 묻고 싶다. 한국이 좋아 우리를 배우러 온 외국인 손님에게 우리가 보여줘야 할 진짜 ‘품격’은 무엇인가. 이름조차 한눈에 읽기 어려운 남의 나라 글자인가, 아니면 세계가 찬탄하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글자, 한글인가?

디자인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소통의 언어다. 특히 글로벌 소통의 장인 유튜브 같은 공간에서, 한자로 뒤덮인 안동소주는 한국의 정체성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다. 러시아 친구가 보드카를 건넬 때 키릴 문자의 강렬한 조형미를 당당히 내세우듯, 우리 역시 우리 술을 건넬 때는 가장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한글의 아름다움을 먼저 보여줬어야 했다. ‘박재서 안동소주’, ‘조옥화 안동소주’라는 이름이 하얀 도자기 병 위에 유려한 한글 캘리그래피로 새겨져 있었다면 어땠을까. 한국을 공부하는 처형에게는 술을 마시기 전, 그 병을 쥐는 순간부터 이미 하나의 아름다운 한국 문화가 마음 깊이 각인되지 않았을까.

진정한 전통은 과거의 유물을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며 소통하는 것이다. 한자에 기댄 권위주의는 전통주가 젊은 세대와 세계인에게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보이지 않는 벽이 될 뿐이다. 한글은 그 자체로 가장 현대적이고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우리의 자부심이다. 굳이 읽기 힘든 한자를 빌려오지 않아도, 정갈하게 쓰인 우리 글자만으로도 명인의 정성과 술의 고결함은 충분히 전달될 수 있다.

술잔 속에 담긴 액체는 투명하고 맑았지만, 병에 새겨진 검은 한자들은 여전히 무겁고 불투명했다. 이제는 그 낡은 도포 자락을 과감히 벗겨내야 할 때다. 빌려온 문자의 그늘에서 벗어나, 우리 글의 당당한 얼굴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한글로 적힌 ‘안동소주’ 네 글자가 술병 위에서 시원하게 읽힐 때, 우리는 비로소 외국인 손님에게 어떠한 머뭇거림도 없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술이다”라고 말이다.

보통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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