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조선의 여성 예술가를 떠올릴 때 몇 가지 익숙한 이름을 기억한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역시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을 단순히 ‘유명한 여성’으로 나란히 놓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현모양처”라는 이름에 가려진 신사임당
우리는 보통 신사임당을 ‘율곡 이이의 어머니’ 혹은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의 삶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이미지 하나로 설명하기엔 꽤 아까운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신사임당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예술가였고,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한 뛰어난 화가였다. 오늘날 5만 원권 화폐 속 인물로 남아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1504년, 강릉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신사임당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외가에서 자라며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학문과 예술을 배울 수 있었고, 특히 그림에 큰 소질을 드러냈다. 외할아버지는 손수 사서삼경을 가르쳤고,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의 산수화를 구해줄 만큼 딸의 재능을 아꼈다고 전해진다.
그 덕분이었을까. 신사임당은 꽃과 곤충을 섬세하게 그려낸 <초충도>로 독창적인 화풍을 남겼다. 단순한 취미 수준이 아니었다. 당시에도 그의 그림은 높은 평가를 받았고, 조선 여성 화가 가운데 가장 널리 이름을 남긴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신사임당은 19세에 이원수와 혼인한 뒤에 4남 3녀를 낳아 길렀다. 그중 셋째 아들이 바로 훗날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로 불리게 되는 율곡 이이다. 다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조선 후기의 가부장 질서와 달리, 당시 조선 전기 사회는 지금보다 여성의 권리가 비교적 강하게 남아 있었다. 신사임당 역시 혼인 후 오랜 기간 친정에서 생활했으며, 재산 상속이나 제사 역시 아들과 딸이 비교적 동등하게 참여하던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인지 후대에는 신사임당을 단순히 ‘남편을 잘 섬기고 자식을 훌륭히 키운 여성’으로만 기억하는 시선에 대한 아쉬움도 남는다. 실제 신사임당은 유교 사회 속에서도 자신의 재능과 주체성을 분명히 드러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리학 질서가 강화되면서, 그는 점차 이상적인 여성상의 표본처럼 소비되기 시작했다.
특히 노론의 거두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세력은 율곡 이이를 정신적 상징처럼 떠받들었고, 그 과정에서 신사임당 역시 ‘현명한 어머니이자 어진 아내’라는 이미지로 재구성되었다. 물론 그것 역시 그의 삶의 일부였겠지만, 그것만으로 신사임당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신사임당은 누군가의 어머니이기 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인정받았던 예술가였고, 시대의 제약 속에서도 재능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다시 바라봐야 할 신사임당의 모습도 바로 그 지점에 있는지 모른다.
신사임당이 살았던 조선 전기에는 아직 개인의 삶과 재능이 완전히 하나의 틀로 고정되기 전이었다. 여성의 삶 역시 지금보다 훨씬 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 사회는 점점 더 단단한 규범으로 들어간다. 개인의 재능보다 역할이 앞서기 시작했고, 그 틀은 특히 여성에게 더 빠르게 적용되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일상이 된 시대에 또 다른 이름이 등장한다. 신사임당보다 한 세대 뒤, 훨씬 더 좁아진 틀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감당해야 했던 허난설헌이다.
조선의 천재 시인, 허난설헌
1571년, 조선 문단이 술렁였다. 여덟 살 아이가 지은 시 한 편 때문이었다. 제목은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 서문
신선 세계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고, 옥황상제를 모시는 직책을 맡았네. 용을 타고 맑은 하늘에 올라 아침에 봉래산에서 출발해 저녁에 방장산에서 잠드네. 학을 타고 삼신산을 노닐며 신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네. 천 년 동안 신선의 정원에서 지내다가 잠깐 꿈속에서 인간 세상의 먼지 속에 떨어졌구나. 신선의 경전인 ‘황정경’을 잘못 읽은 탓에 끝없는 하늘 궁전에서 쫓겨나, 붉은 실의 인연으로 인간 세상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노라.
궁궐의 이름처럼 낯설고 거대한 이 시의 작가는 놀랍게도 한 어린 소녀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허초희. 우리는 그를 보통 허난설헌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강릉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허난설헌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 허엽과 형제들 역시 뛰어난 문인이었고, 훗날 사람들은 이 가족을 ‘허씨 5문장’이라 불렀다.
여성의 교육 기회가 점점 제한되던 시대였지만, 허난설헌은 집안의 지원 속에서 자유롭게 학문과 시를 배울 수 있었다. 특히 둘째 오빠 허봉은 여동생의 재능을 누구보다 아꼈고, 직접 뛰어난 스승까지 구해줄 정도였다고 한다. 허난설헌의 재능은 일찍부터 남달랐다. 어린 나이에 이미 뛰어난 한시를 지었고, 그 이름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천재성만으로 삶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15세에 김성립과 혼인한 뒤 허난설헌의 삶은 급격히 달라졌다. 조선 중기로 접어들며 여성은 혼인 후 시가에서 살아야 하는 분위기가 강해졌고, 성리학적 질서가 정착되면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제한되었다. 여성은 글을 쓰는 것조차 터부시되어 재능이 있어도 인정받기 어려웠다. 허난설헌 역시 혹독한 시집살이를 겪어야 했다. 시댁은 재능 있는 며느리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남편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허난설헌은 지인들에게 자신의 한을 세 가지로 정리해 말하곤 했다. 조선에서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난 것, 그리고 마음을 나눌 만한 남편을 만나지 못한 것.
삶은 점점 더 허난설헌을 몰아붙였다. 친정아버지와 오빠 허봉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고, 사랑하던 자식들마저 먼저 잃었다. 결국 그는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죽기 전 허난설헌은 자신의 글을 모두 태워달라고 유언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동생 허균은 누이의 시를 잊지 않고 기억해 냈고, 훗날 이를 모아 <난설헌집>으로 엮었다. 동생 허균은 이후 <홍길동전>을 남기게 되는 인물이다.
흥미로운 건 허난설헌의 시가 조선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더 큰 사랑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의 시집은 명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일본에서도 널리 읽혔다. 반면 조선에서는 허균이 역모 혐의로 처형된 뒤 그의 흔적까지 금기시되면서 작품 역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렇게 잊혀가는 듯했던 허난설헌의 시는 사후 100여 년이 지나 일본을 통해 다시 조선에 전해졌고, 이를 읽은 정조 역시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조금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여성의 재능을 더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시대였다면, 허난설헌은 훨씬 오래, 그리고 더 빛나는 이름으로 남지 않았을까.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함께 놓고 보면 한 가지가 선명해진다. 재능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놓인 시대가 사람의 삶을 바꾼다는 사실이다. 같은 재능도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남는다. 어떤 재능은 비교적 자유로운 틀 속에서 꽃피고, 어떤 재능은 점점 좁아지는 틀 속에서 소모된다.
오늘, 이 두 사람을 함께 살펴본 이유는 결국 하나다. 재능은 개인이 타고나는 것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평가되고 기억되는지는 시대가 결정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남녀의 구별 없이 저마다 타고난 재능이 꽃피울 수 있는 시대, 우리가 만들고 지켜야 하지 않을까.
보통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