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꽁초 수거보상제에서 얻은 성찰 – 보상이 목적이 되는 순간 삶은 고되어진다. 결국 선택이란 보상을 좇는 일이 아니라, 그 선택을 통해 ‘어떤 나’를 만들어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고층에 살다 보면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일이 잦다. 층층이 서느라 천천히 내려오는 숫자를 멍하니 세는 것보단, 차라리 게시판으로 눈을 돌리는 게 덜 지루하다. 대개는 아파트 점검 소식 같은 무미건조한 안내문뿐이지만, 그날은 유독 눈에 밟히는 조그만 공고문 하나가 있었다. 바로 ‘담배꽁초 수거 보상제’에 관한 안내였다.
전용 비닐 팩에 담배꽁초 200g을 채워오면 종량제 봉투 5L짜리 스무 장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평소라면 쓱 읽고 넘겼을 터였다. 행정복지센터까지 오가는 걸음도 번거롭거니와, 돈으로 환산하면 고작 4~5천 원 남짓한 보상에 혹하기엔 6월 초여름의 햇볕이 너무 뜨거웠던 탓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오는 내내 그 문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행정복지센터에 전화를 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불법 주정차를 신고해 포상금을 챙기는 일명 ‘카파라치’에 대한 기사가 문득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종량제 봉투 사냥꾼’쯤 되는 걸까. 포상금이면 차라리 듣기 그럴싸하기라도 하지, 종량제 봉투라니. 공공기관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고작 봉투 몇 장 얻겠다고 유난을 떠는 것 같아 괜스레 민망했다. 사람이 무언가에 홀린 듯 일을 저지르는 게 바로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상냥한 목소리의 공무원이 “방문하시면 담배꽁초 수거 팩을 드리겠다”라고 답한 뒤였다. 이제 와 그만두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다들 나와 비슷한 부끄러움이나 귀찮음을 느꼈던 걸까. 센터에 도착해 신청 대장을 확인해 보니 내 이름이 들어갈 자리는 첫 장의 첫 줄이었다. 그렇게 이름을 적고 나니 묘한 오기가 생겼다. 기왕 체면을 내려놓은 이상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매일 도서관을 오가는 길목에서 시달려야 했던 길거리 간접흡연의 고통이 떠올랐다. 그들이 아무렇게나 내던진 흔적들을 줍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목표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맨손에 장갑만 끼고 나설까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싶어 서랍 속 튀김용 집게를 찾아 들었다. 아파트 주변 산책로를 돌며 하수구 철망 사이에 낀 꽁초까지 샅샅이 집어 올릴 때만 해도, 마음 한구석엔 왠지 모를 뿌듯함이 차올랐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후 내내 동네 골목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수거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흡연자들이 연기는 고래처럼 뿜어대면서, 정작 버리는 꽁초는 손가락 두 마디도 안 될 만큼 짧다는 사실에 어처구니없는 억울함이 밀려왔다. 애초에 길바닥에 투기하면 안 된다는 상식은 한참 뒤에나 떠올랐다. 담배꽁초 200g은 생각보다 거대한 수치였다. 고기 200g은 한 끼 식사로도 가벼우니 내심 만만하게 보았는데, 그 가벼운 필터를 모아 무게를 채우려면 수백 번의 가쁜 집게질이 필요하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그러나 담배꽁초 수거의 진짜 복병은 따로 있었다. 바로 200g을 다 채우기까지 꽁초를 보관하는 일이었다. 밀봉에 밀봉을 거듭해도 찌든 니코틴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다. 매일 새로 주워 온 꽁초를 봉투에 밀어 넣을 때마다 매캐한 악취가 코를 찔렀고, 그 순간만큼은 후회마저 밀려왔다. 이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종량제 봉투를 얻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었지만, 중간에 포기하기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꽁초 지옥에 갇혀 소파에 늘어져 있던 어느 날, 문득 야구 선수 오타니 쇼헤이의 일화가 머리를 스쳤다. 그는 경기장 위의 쓰레기를 주우며 ‘타인이 무심코 버린 운을 줍는 것’이라는 자신만의 철학을 말했다. 세상은 그가 보이지 않는 행운마저 통제하려 한다며 감탄했지만, 훗날 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속뜻은 더 깊었다. 그 운이 반드시 안타나 홈런 같은 당장의 성과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늘 찡그린 사람보다 밝게 인사하는 이에게 정이 가듯,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고 다듬어 가는 과정. 그 길 위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될 좋은 인연과 태도 전체를 그는 ‘운’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나는 오타니처럼 거창하게 내가 원하는 인간상이 되기 위해 집게를 든 것이 아니었다. 아파트 게시판에서 그 글을 봤을 때 내 첫 마음은, 매일 걷는 내 동네를 내 손으로 조금이나마 깨끗하게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책임감, 그리고 산책길에 작은 뿌듯함을 더하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쓰레기봉투는 그저 시작을 도와준 좋은 계기였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새 대가에만 집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새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참으로 인간은 이토록 초심을 잃기가 쉽다.
타인의 시선과 보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다시 길을 나서자, 거짓말처럼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허리를 숙여 꽁초를 집어 올리는 손길에 더 이상 부끄러움은 묻어나지 않았다. 거리를 깨끗하게 가꾸는 행위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자 맑은 해방감이 찾아왔다. 타인의 무책임함을 외면하는 방관자가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선 자리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려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한 걸음 나아간 기분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 학창 시절, 단순히 성적을 올리거나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공부하면 쉽게 지치지만, 이루고 싶은 꿈을 품으면 지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를 끝까지 달리게 만드는 동력은 단기적인 보상이 아니다. ‘이 행위를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던지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계속해서 거리를 청소하게 만드는 것 역시 종량제 봉투가 아니라, 꽁초를 줍는 그 찰나에 내 안에 차오르는 단단한 자부심인 것처럼 말이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주워 모은 담배꽁초는 마침내 기준치인 200g을 훌쩍 넘겼다. 묵직해진 팩을 보니 입가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가만 보니 오늘이 행정복지센터 수거 날짜가 아닌 게 아닌가. 이런~
윤별|Editor 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