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책은 계절이 바뀌듯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문득 찾아온다. 책장의 수많은 책 사이에서 유독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다시 손이 간 것은, 내 삶의 모퉁이에서 나도 모르게 이 이야기가 필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같은 작가의 ‘설득’이 남긴 여운이 정서적으로는 더 짙었음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헛헛하거나 생각이 복잡해질 때면 늘 이렇게 익숙한 궤도로 돌아오게 된다. 새로움이 주는 설렘보다, 나를 온전히 품어주는 익숙함이 더 편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사실 내게 고전을 읽는다는 일은 어딘가 무거운 의무감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고전이라는 타이틀이 붙지 않을 것 같았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읽었을 때 그리고 단테의 ‘신곡’을 읽으며 그 생각은 더 굳어졌다. 인간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정면으로 들추어내고, 읽고 난 뒤에도 마음이 가만히 있지 못하게 흔들어 놓는 것만이 고전의 자격이라 믿었다. 반드시 거창한 메시지를 남겨야 하고, 독자를 치열하게 고민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빳빳한 인식으로, 시간이 한참 흘러 ‘오만과 편견’을 다시 만났을 때 새롭게 느낀 것은 뜻밖의 ‘가벼움’이었다. 치열한 이념도, 파멸하는 인간도 없었다. 하지만 그 가벼움은 결코 쉽게 증발하는 종류가 아니었다. 거대한 사건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인물들의 마음이 계속해서 조금씩 출렁이고 있었다. 말 한마디, 시선 하나, 사소한 오해 하나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물길을 바꾸듯 조용히 이야기의 방향을 틀어놓았다. 큰 파도 대신 잔잔한 물결이 사람을 더 깊이 몰입시킬 수도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처음부터 서로를 완벽하게 잘못짚고 시작한다. 그런데 그 오해의 시작이 극적인 음모가 아니라, 파티장에서 나눈 아주 사소하고 사적인 판단 때문이라는 점이 이 소설을 현실적으로 만든다. 누군가를 처음 이해한다는 게 얼마나 불완전하고 오만한 일인지, ‘오만과 편견’은 설명하려 들지 않고 그저 인물들의 서툰 발걸음으로 보여줄 뿐이다. 오해가 풀리는 과정 역시 느리고 조용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는 게 아니라, 이미 지나간 감정의 궤적들을 혼자 가만히 되짚어 보는 시간이 쌓이면서 마음의 각도가 아주 조금씩 수정될 뿐이다.
이들의 지지부진한 관계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얼마나 편리하게 단순화해 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모든 갈등이 해결된 하나의 완성된 결말처럼 말하지만, 실제 삶의 사랑은 그리 매끄럽지 않다. 소설 속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끊임없이 엇박자를 낸다. 재미있는 건, ‘오만과 편견’이 주는 깊은 울림이 ‘어긋남이 마침내 사라진 순간’이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참 많이도 어긋났었구나’ 하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성찰의 순간들에서 온다는 점이다. 사랑은 완벽한 결합이 아니라, 서로의 불완전함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메워가는 과정 그 자체였다.
‘오만과 편견’이 보여주는 ‘결혼’의 민낯 역시 같은 맥락에서 깊은 잔상을 남긴다. 소설 속 결혼은 달콤한 로맨스의 결실이라기보다, 냉혹한 현실의 구조에 훨씬 가깝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세계 한편에는, 사랑만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밥벌이와 안전의 세계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특히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의 선택이 유독 오래 마음에 밟혔다. 낭만주의자의 눈에 샬럿의 결혼은 속물적인 타협으로 보였겠지만, 나이가 들고 현실을 겪으며 다시 읽은 내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사랑 없는 안정을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선택이 소설 밖의 현실과 비교해도 전혀 비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서늘했다. 그것은 비겁한 포기가 아니라,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삶의 조건을 정확히 알고 내린 또 다른 방식의 주체적인 선택이었던 셈이다. 어릴 적엔 그저 속물의 타협으로만 보였던 장면들이, 삶의 무게를 아는 지금에야 비로소 온전히 이해가 가기 시작한 것이다.
샬럿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타인의 인생에 대해 어떤 판단도 쉽게 내릴 수 없어진다.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대기 전에, 각자의 삶이 짊어지고 있는 무게와 조건이 먼저 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가장 멋진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이 이상으로 반짝이는 순간과 현실의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순간 사이에서, 제인 오스틴은 성급하게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저 그 모순적인 사잇길에 오래도록 머물며 양쪽 모두를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 역시 모두 저마다의 결함을 안고 그 경계 위에 서 있다. 레이디 캐서린의 눈먼 확신, 베넷 부인의 대책 없는 조급함, 리디아의 철없는 충동, 위컴의 미끈한 가벼움은 200년 전 영국에만 있던 것들이 아니다. 지하철에서, 직장에서, 당장 내 안에서 매일 마주하는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형태들이다. 그래서 이 오래된 소설 속 인물들이 전혀 낯설지 않고, 자꾸만 지금의 사람들과 겹쳐 보인다. 인간의 본질이라는 게 세월이 흘러도 참 지독하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은 때로 조금 씁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만 원체 불완전한 게 아니구나’ 하는 묘한 위로와 안심을 주기도 한다.
이번에 책을 덮으며 내 안에 가장 묵직하게 남은 것은 어떤 명확한 교훈이나 결론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을 바라보는 ‘거리감’이 조금 달라졌다는 감각이었다. 예전에는 내 기준에 맞춰 누군가를 ‘오만’하게 단정 짓거나, 나만의 ‘편견’으로 상대를 다 안다고 착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영역을 그저 불완전한 채로 내버려두는 법을 조금은 배우게 된 것 같다. 사랑도, 관계도, 판단도 모두 그렇게 완전하지 않은 상태로 서툴게 존재해도 괜찮다는 넉넉한 마음이 생겼다.
‘오만과 편견’은 결국 주인공들이 완벽한 인간으로 거듭나거나 완벽한 이해에 도달하는 승리의 기록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서툰 순간들을 겸손하게 되짚어 보는 반성문에 가깝다. 그리고 그 긴 여정이 끝난 뒤에 남는 것은 대단한 확신이 아니라,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부드러워졌다는 감각이다. 이 작고 미세한 온기의 변화 때문에, 우리는 이 오래된 이야기를 계절이 바뀌듯 자꾸만 다시 찾아 읽게 되는 것이 아닐까.
소하|Editor 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