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랜디 포시가 ‘마지막 강의’에서 던진 질문, “우리는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하는가”

the last lecture
카네기 멜런 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 랜디 포시가 말기 췌장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생애 마지막으로 강의한 내용을 기자인 제프리 재슬로의 도움을 받아 엮은 책 “마지막 강의” (원제 The Last Lecture)

오랜만에 책장을 정리하다가 먼지가 살짝 앉은 랜디 포시의 ‘마지막 강의’를 발견하고 사색에 잠겼다. 예전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스승의 가르침’이 지금은 왜 이토록 낯설고 귀한 풍경이 되었을까. 어쩌면 인간의 본성을 바른길로 이끄는 교육의 힘보다, 타고난 본성의 무게가 더 무겁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다 문득, 나는 개인적으로 성선설보다 성악설을 더 믿는 편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후천적으로 폭력성을 배운다고들 하지만, 이 세상에 선함만 존재했다면 학습할 ‘악’ 자체가 아예 없어야 했다는 나만의 고집스러운 논리 때문이다. 평소에는 단단한 이성의 벽에 가로막혀 있을 뿐, 사람 안에는 저마다 작은 악이 숨을 죽인 채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보곤 한다.

그래서 나는 늘 교육의 힘이 중요하다고 믿어왔다. 본능을 다스리고 타인과 어우러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니까. 하지만 ‘학부모의 교사 폭행 사건’과 같은 세상 소식들을 접하면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부정적인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는 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기에, 지금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교권이 무너진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해서다.

민원이 무서워 당장 몸을 사리며 복지부동하는 사회 분위기 탓일지도 모르겠다. 시끄럽다는 민원 하나에 아이들의 축제인 운동회가 취소되고, 혹여 내 아이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까 봐 상장과 성적표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씁쓸해진다. 학생을 바르게 훈계한 스승이 도리어 아동학대로 고소를 당하는 현실 앞에서, 이제 학교에는 아이를 혼내지 않고 숙제도 내지 않는 조용한 선생님들만 남아 가고 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던 시절이 불과 한 세대 전이건만, 이제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학부모가 교사를 폭행했다는 뉴스까지 들려온다. 스승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한없이 우스워진 ‘교사’라는 직업만 남은 것 같아 쓸쓸하다. 어쩌다 선생님들이 스스로 노동자라 자처하며 권위를 내려놓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자식을 향한 학부모들의 서툴고 거세진 사랑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굴복해 버린 서글픈 결과가 아닐까 싶다.

내 아이가 세상의 어떤 풍파에도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아무런 자극도 없는 무균실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점차 제멋대로 사는 법을 배운다. 타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상대방을 억누르고 통제하려 들면서 그것을 ‘애정’이라 쉽게 합리화하곤 한다. 그러나 통제가 애정이 아님은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다.

사람들은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문장을 심심찮게 꺼내 들곤 한다. 이 말은 과거 스페인에서 권위에 의한 어떠한 억압도 아이들에게 실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교육 순교자, 프란시스코 페레가 남긴 말이다. 어른들의 정치적 알력 싸움에 아이들을 이용하지 말라는 숭고한 뜻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이 말은 점차 ‘철저한 폭력과 통제의 배제’라는 극단적인 의미로 변질되어 가는 모양새다.

물론 아이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은 당연히 옳다. 하지만 그 완벽한 자유로움이 결과적으로 ‘방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처벌이 없는 훈계는 과연 얼마나 힘이 있으며, 그저 오냐오냐 지켜봐 주는 것이 아이를 망치는 길이 아니라는 보장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인터넷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애견인들 사이에서 아무리 문제견이라도 엄격한 훈육으로 교정해야 한다는 입장과 부드러운 사랑만이 답이라는 이들의 대립이 단골 콘텐츠로 올라오는 것을 본다. 그리고 이런 입장 차는 비단 동물에게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꽃으로도 때리면 안 된다’라는 이들과 ‘안 맞아봐서 요즘 애들이 버릇이 없다’라는 이들의 거친 키보드 배틀에는 최근 들어 자조 섞인 목소리가 부쩍 많아졌다. 교권이 추락하고 학부모들의 어긋난 사랑이 기사화될 때마다, 문제가 된 아이들까지 싸잡혀 욕을 먹는 까닭이다.

곱게 키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지만, 솔직히 인권의 문제를 떠나 마냥 때리는 것 또한 답이 될 수 없다. 역으로, 아이가 어긋난 길로 가고 있음에도 그저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이 과연 진정한 ‘존중’일까. 지적하는 일은 참 쉽지만, 대체 무엇이 똑바로 된 존중이며 올바른 교육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무겁게 남아 있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하는 걸까.

책장에서 꺼내 든 랜디 포시의 글귀를 가만히 짚어보았다. 이미 여러 번 읽어 모든 내용이 인상 깊은 책이었지만, 이번에는 그가 어릴 적 미식축구를 배우며 만났던 그레이엄 코치의 대목이 유독 긴 울림으로 다가왔다.

드디어 모든 훈련이 끝났을 때, 보조 코치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 위로를 했다. “그레이엄 코치가 널 꽤나 힘들게 길들이지?” 그가 말했다. 나는 “네”라는 대답조차도 하기 힘들었다.

“그건 좋은 거야.” 보조 코치가 말했다. “네가 잘못하고 있는데도 더 이상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널 포기했다는 뜻이야.”

이 말은 그날 이후로 평생 내게 깊이 각인되었다. 만약 당신이 일을 잘못 처리하고 있는 것이 명백한데 아무도 당신에게 한마디 해줄 생각조차 안 한다면, 그거야말로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듣고 싶지 않은 소리일지라도, 당신을 비판하는 사람이야말로 대부분 당신을 진정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며 당신을 좀 더 발전시키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요즘은 자녀들에게 자신감을 키워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자신감은 당신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 스스로 키워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랜디 포시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8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이 대목은 여전히 요즘의 교육 현실을 날카롭게 관통하고 있었다. 독설처럼 느껴지는 쓴소리 속에 눈물겨운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 아이는 실패와 포기를 배우기 위해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 입성한다. 실패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 소중한 학창 시절에, 가장 낭만적인 패배를 경험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법을,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타인에게 올바르게 도움을 청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단순히 교과서 공부만을 위해서였다면 굳이 학교에 갈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사교육과 인터넷 강의가 더 널린 세상이니 말이다. 그러니 결국 학교와 스승의 역할은 아이들이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에 부딪히며 사회에 잘 녹아드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역할은 그런 스승의 자리를 존중해 주며, 아이의 몸과 마음에 필연적으로 생겨날 작은 상처들을 바라보며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 하고 의연하게 넘겨주는 일일 것이다.

단 한 번도 넘어져 보지 않은 아이는 실패가 두려워 변명과 합리화를 먼저 배운다. 도전하기보다 ‘가능성만 있는 상태’에 안주하려 들고, 자신이 위로 올라가기보다 높이 있는 사람에게 흠집을 내어 끌어내리려 한다. 그리고 이런 나쁜 습관은 끝내 한 명의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데 치명적인 결격 사유가 되고 만다.

아무리 곱게 키워봤자 자존감은 부모가 대신 만들어줄 수 없다. 아이들은 다쳐가며 사회를 배우고, 실패 끝에 달콤한 성공을 맛보며 스스로 자신감을 찾아가는 법이다. 그 과정에서 스승이 건네는 따끔한 쓴소리는 아이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독이 아니라, 오히려 성장에 필요한 약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육에 결코 감정적인 ‘사감’이 섞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아픈 것이 싫은 건 인간의 본능이라, 아무리 필요하다 해도 이러한 ‘쓴소리와 훈육’은 기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한 명확한 패널티가 있어야만 교육은 비로소 힘을 얻는다. 무언가를 해내면 상을 주겠다고 해놓고 지키지 않을 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금이 가는 것처럼, 모든 교육의 바탕에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저 상처 주지 않으려는 것에만 급급한 요즘 교육계가 힘을 잃고 추락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동학대와 진정한 교육의 한 끗 차이는, 결국 훈육자의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명확한 규칙’에 의거했는지 여부다. 정해진 약속에 따라 상과 벌을 주는 일관됨 속에서,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단단한 신뢰를 쌓아간다.

자식을 향한 과한 욕심은 쉽게 사람의 눈을 가린다. ‘애정’이라는 따뜻한 이름이 빌미가 되면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사람부터 자신이 교육해야 할 본질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나의 결핍 때문에 아이의 행동을 억누르려 하는 것은 ‘통제’이며, 규칙을 준수하게 하고 사회인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진짜 ‘애정’이다.

랜디 포시가 말했듯, 우리는 어쩌면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라나고 있는 ‘재생 중인 얼간이’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멋진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따끔한 비판을 기껍게 수용할 수 있는 넉넉한 품을 가져야 한다. 마냥 싸고도는 것만이 사랑이 아님을 이제 우리는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잘못에 대한 벌을 반드시 매나 폭력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피교육자인 아이들로서도, 당장 마주하는 작은 수치심과 아픔이 훗날 세상을 살아갈 나를 튼튼하게 만들어줄 ‘예방주사’와 같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마냥 부드러운 바람만 불어오는 온실 속에서는 아름드리나무가 자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손때 묻은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 넣으며 조용히 되새겨본다.

윤별|Edi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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