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전에, 선거에 대한 글을 쓰고나서 뭔가 미진함이 있었는지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찝찝한 것이 뭔가 할 말이 더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어젯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리에 누워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다 번쩍하고 생각하나가 지나갔다.
이란전쟁, 스타벅스, 일베, 5·18 …. 자극적인 영상과 뉴스 기사들, 그리고 그 밑에 달린 수많은 댓글을 보다가 문득 기묘한 서늘함이 엄습했다. 사람들은 복잡한 사실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누군가 정해준 10초짜리 결론에 열광하고,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무섭게 분노하며 편을 갈랐다. 그 끝없는 자극과 확증의 굴레 속에서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인물이 있었다. 찝찝함의 근원, 이거였구나!
모든 시대가 경계해야 할 전쟁범죄자이자 선동가, 요제프 괴벨스다. 지금 그를 기억해 낸 것은 그가 저질렀던 악행들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일상의 편리함에서 너무나 쉽게 그 위험성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요샛말로 ‘종특’이라고 한다던데, 확실히 인간의 이 단기 기억상실 증상은 문제가 있다.
괴벨스라고 하면 대개 사람들은 이미 결론이 끝난 인물처럼 생각한다. 악인, 전범, 선동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어 몇 개로 정리해버리면 오히려 가장 위험한 부분은 놓칠 수 있다. 괴벨스라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문제는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공략했었던 인간의 ‘약점’이다. 우리 인간은 어떤 약점이 있을까.
괴벨스가 선동하는 데는 몇 가지 패턴이 있었다. 괴벨스는 사람을 단번에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어떻게 익숙해지고, 어떻게 분노하며, 어떻게 생각을 멈추는지를 관찰했다. 그리고 그 흐름을 이용했다. 어쩌면 그는 사람의 본성을 믿었던 인물인지도 모른다. 믿음이 너무 확고해서 그것을 거리낌없이 사용했을 뿐이다. 그의 방식은 의외로 단순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복잡한 세계를 단순하게 자르고, 생각보다 감정을 먼저 움직이는 것. 듣기에는 평범하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반복에 약하다. 처음에는 의심스럽던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진 것은 어느 순간 의심의 대상에서 빠져나간다. 사람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만한 것을 믿는다기보다, 자주 접한 것을 자연스럽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괴벨스는 바로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괴벨스는 세계를 단순하게 만들었다. 복잡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대신, 이해하기 쉬운 구조로 바꾸었다. 약자와 강자, 피해자와 가해자. 노동자와 사용자, 세상은 원래 그리 간단하지 않지만, 사람은 복잡하면 쉽게 피로를 느낀다. 생각해야 하는 세계보다, 이미 정리된 세계를 더 편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위에 감정을 얹었다.
공포와 분노는 언제나 이성보다 빠르다. 사람은 먼저 반응하고, 나중에 이유를 붙인다. 이미 화가 난 사람은 사실을 찾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할 말을 찾는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한번 불안이 자리 잡으면, 그다음부터는 모든 정보가 그 불안을 증명하는 방향으로만 읽히기 시작한다.
그래서 선동은 거짓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과 익숙함, 단순함이 서로 맞물릴 때 더 강해진다. 반복된 말은 익숙해지고, 익숙함은 의심을 지우고, 의심이 사라진 자리에는 감정이 쉽게 들어온다. 무서운 점은 이것이 특별한 시대에만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선동을 과거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독재와 전쟁의 시대에서나 가능했던 낡은 방식처럼 여기지만, 사실 형태만 달라졌을 뿐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사람들은 가장 단순한 문장에 끌리고, 가장 강한 감정에 반응하며, 가장 자주 들리는 말을 사실처럼 받아들인다.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세 사람이 외치면 믿게 된다는 ‘삼인성호’라는 옛말이 그 증거다. 그럴 리 없는 당연한 이성은 반복되는 소음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진다.
우리의 온라인 속 일상은 이를 너무나 잘 증명한다. 광우병, 사드, 후쿠시마, 내란…. 끝없이 뱉어내는 기성 언론의 자극적인 뉴스 헤드라인은 복잡한 맥락을 단 몇 초 만에 ‘내 편과 네 편’으로 잘라낸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확증과 분노만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피드에 띄운다. 댓글 창은 이미 이성적인 토론의 장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쏟아내는 감정의 배설구가 된 지 오래다. 괴벨스가 라디오라는 매체로 대중의 눈과 귀를 가렸듯, 지금 우리는 손안의 미디어를 통해 스스로 보고 싶은 세상에 갇히고 있다.
정보가 넘치는 시대가 되었지만, 우리 인간의 깊이까지 깊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말 속에서 사람들은 더 빠른 결론을 원한다. 긴 설명보다 짧은 확신을 좋아하고, 복잡한 맥락보다 선명한 편 가르기를 편하게 느낀다. 그러다 생긴 빈틈은 언제나 선동이 들어오는 자리였다.
우리가 괴벨스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의 방식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너무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약점을 너무 정확히 이해했던 사람. 그리고 그 약점을 정치적으로 사용했던 사람. 그 사람이 요제프 괴벨스였다.
“말했다고 해서 들은 것은 아니다.
들었다고 해서 이해한 것은 아니다.
이해했다고 해서 동의한 것은 아니다.
동의했다고 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아니다.”— 콘라트 로렌츠
굳이 로렌츠의 말을 인용하는 까닭은,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위험을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거기서 멀어지지도 않는다. 인간은 반복해서 같은 감정에 흔들리고, 같은 방식에 끌린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무서운 점이다.
괴벨스를 역사 속 괴물로만 남겨두는 순간, 우리는 안심하는 ‘실수’를 한다.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특별한 악인이 아니라, 악인이 이용하는 ‘방식’이고, 그런 방식이 통하는 우리 인간 자신인지도 모른다. 괴벨스 같은 악인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보통아재








